여름이 한창이다. 아직 창 밖의 매미는 울지 않고, 수박값은 너무 비싸며, 거기에 장마도 아직 오지 않았다. 홍대 앞 어느 카페를 가더라도 팥빙수를 팔고 있어서 기쁘지만, 그 옆에 적힌 가격표를 보면서 기가 찬 여름이다. 또 나는 그 어느 여름에, 여전히 그런대로 산다. 매일매일 더 많이 웃으려고 하고, 그리고 이제 너를 더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서, 네가 생각나지 않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일부러 너를 찾아가, 네가 어떻게 살아왔을지를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 그것으로 됐다.고 믿는다.

나는 요즈음,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만나고 있다. 허나 학기의 끝이라서, 직장으로 다니는 학교에서는 일이 무척 많았다. 시험문제를 출제하고, 시험감독에 서고, 채점하고, 성적을 냈다. 매일매일이 말도 못하게 정신없게 돌아갔다. 공부하러 다니는 학교에서는, 발표가 끝난 과목의 파이널 제출을 앞두고 있어 또,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그 바쁜 와중에도, 틈틈히 계속 약속이 많았다. 퇴근하는 밤마다, 나는 약속을 많이 잡았다. 그리고 지난 금요일에는 졸업생 주제에 눈치없게 학부 소모임의 도보여행에 하룻밤 따라갔다 오기도 했다. 2만원이 훌쩍 넘는 수박을 두통이나 사들고 가서, 수십 명의 사람들 속에서, 단내를 풍기는 나를 공격하는 벌레들과 함께, 웃고 떠들고 장난치며 그 어느 여름밤을 보냈다. 나는 사람들 틈속에서, 자주 아이처럼 말갛게 웃었다.

그래도 나는 이따금씩, 내가 너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을 때가 있다. 네가 가끔, 마치 벼랑 끝에서 손을 뻗는 것처럼 내 발목을 붙잡는다. 나는 그 때마다 발이 제멋대로 엉켜서 넘어진다. 네가 불쑥 튀어나오는 때는 도통 일정치가 않아서, 밥을 먹다가, 퇴근을 하다가, 누군가와 만나 이야기를 하다가, 샤워를 하다가, 소설을 읽다가, 도보여행의 밤, 수십명이 뒤엉켜 자는 방에서, 나는 혼자 넘어져 아침을 맞이했다. 그리고 실제로 엊그제부터 왼쪽 발목이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네게 걸려 넘어진건지, 마음에 네가 걸려서 내가 넘어진건지 모르겠다. 쨌든 발목이 시큰하다. 그리고, 점점 더 아픈 것 같다. 누가 잡아주지 않으면, 일어나지도 못할 것 처럼.

식욕에 있어 거식과 폭식은, 한끝차이라더니, 예전에는 신경쓰이는 일이 생기면, 음식을 잘 먹지 않았는데, 난 두어달 전부터 식욕이 지나치게 좋아져서 문제다. 부러 단 것을 찾아서 먹고, 밥도 잘 먹고, 간식도 잘 먹고, 밥을 잘 먹고도, 잘 먹는다. 사실 먹는다는 것보다는, 밀어넣는다는 것에 가까워졌다. 그러나, 마음의 허기는 절대 음식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자주, 아귀가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체중계의 건전지가 다 닳았다는 핑계로, 몸무게는 재지 않은지도 한두달은 되었지만, 사실, 나도, 너도 우리 모두가 다 안다. 살이 꽤 많이 불었다는 걸. 잘 먹는게 복스럽고 좋은 세상은 이미 십년도 전에 끝났기 때문에, 나는 이제 자기관리를 하지 않는 게으른 사람으로 변하고 만 것 같다. 괜한 죄책감이 여기서도 온다. 아무래도 이제 정말, 나를 좀 닦고 불어난 살을, 그래. 조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또, 작년의 일을 아는 주변사람들라면, 니가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된게 아니냐고 하겠지만, 앞서 말한 네게도 너무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너를 자주 만나고 있다. 단지 마음이 외로워서도 아니고, 네게 미련이 남아서도 아니다. 나는 너에게 사랑받는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지금의 내가 굳이 너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끝이 뻔한 이야기 속에, 또 다시 모른척 뛰어들었을 뿐이다. 모른척 할 뿐이지. 사실은 다 알고 있다. 이건 정말 그냥, 마음이 그렇게 하는 것 뿐이다. 이런 마음은 한편으로는 편리하지만, 또 가슴 한켠으로는 너무도 불편한 것 같다.

네가 떠나기까지 두달즈음이 남았다. 네가 떠나는 것은 보장되어 있고, 그리고 이대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도 보장되어 있다. 이게 보험이라면, 보장된 것이 많아서 나중에 안심이라도 하겠지만, 그러나 나는 보험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너를 만날 때마다, 마음이 끝에서 끝을 오간다. 나는 남은 시간 동안, 어떤 사고를 당할지 모르며, 내가 네게 크게 마음을 다친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치료를 보장해주지 않고, 그 누구도 내가 보낸 시간을 보상해주지 않을거라는 것도 알고있다.

다만, 정말로 끝과 끝일 뿐이다. 너를 만나는 그 순간에는, 애써 내가 웃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즐겁게 웃을 수 있고, 너를 만나는 그 순간에도, 남아있는 시간이 가고 있다는 불안함이 지구 끝까지 펼쳐지기도 한다. 그렇게 나 홀로, 이 끝과 저 끝을 오가다보면, 우리에게 진짜 끝이, 남은 시간이 조만간 과자봉지처럼 바닥을 드러내리라는 걸 안다. 세계가 글로벌화되어, 세계를 두고 지구촌이라며 이 나라사람도 저 나라사람도 모두 네 이웃이라 말하겠지만, 그래도 지금과 같은, 지하철 다음 정거장 이웃이 아니라, 지구 반대편으로, 수 많은 나라를 뛰어넘어서,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일이 도무지 어떤건지, 나는 좀처럼 상상할 수가 없다.

내겐 잊혀지지 않는 몇가지 텍스트들이 있는데, 대부분은 네가 내게 문자로 한 말들이지만, 예외적으로 내가 네게 했던 말이 한가지 섞여있다. 스물다섯일 때, 네게 적었던 생일 카드의 문장은, 지금도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말하거나 적을 수 있을 정도로, 잊혀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어쩌면, 정말로 그렇게 그 텍스트대로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누군가의 생일을 축하하는 카드라고 하기엔 이상하게도, 거의 처음에 이런 문장을 적어 넣었다.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는 것 같아서, 불안하다고 했었지? 대신에 너는 어디든지 갈 수 있고, 또 어느 곳으로도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네가 알았으면 좋겠다."

헌데, 그 문장을 적을 당시에만 해도, 그 어디가 내가 될 줄은 정말 몰랐다. 네가 이렇게 어디로든 가버리고, 또 불쑥 내게 돌아왔다가, 다시 어디로 가버리게 될 줄, 그래. 그때 내가 어떻게 알았을까. 아니, 내가 뱉은 말을 내가 주워담은 꼴이라, 나는 무엇도 탓하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네가 메뚜기마냥, 이쪽저쪽을 뛰어다니며 살아도, 마음만은 꼭 어디라도 정착해서, 불안해하며 살지 않기를 바란다. 아니. 착한척도 이만하면 고질병이다.

6월, 정말로 그 어떤 여름이다. 나는 여전히 살고, 또 살아있으며, 매일매일을 살아내거나, 살아진다. 나는 네가 헤어진 거기서 아직까지 헤어나오지 못한 걸 모르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끝이 오면, 스물다섯과 스물여섯은 또 새까맣게 잊고, 또 다른 사랑을 찾아서, 살아가리라는 것도 알고 있다. 지금 귓가에서는, 그대없이 살 수 없을거란 노래가사가 흘러나와 가슴을 애먹게 하지만, 사실 나는, 그대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어쩌면 이번에는, 애초에 사랑받지 않았으니, 굳이 다른 사랑이 필요하지도 않을거란 생각이 자꾸만 고개를 든다. 나는 지금, 사랑받지도, 굳이 사랑하지도 않는다. 단지, 이 여름에, 네게 남아있는 시간에, 곁에 있으려고 할 뿐이다.

갑작스럽게 컴퓨터 앞에 앉아, 너무도 잡다해서 별 이야깃거리도 못되는 것을, 손이 가는 대로 이렇게 나불나불 잘도 떠들어가며 길게 적고 말았다. 이렇게 여름밤에, 후두둑 소낙비처럼 블로그에 쏟아져 내린 일기는, 정말로 여름 하늘에 소낙비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정말로, 그 어떤 여름이면,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은, 별일 아니다. 그래서 이 여름도 역시, 살아지거나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