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또다시 거짓말처럼 새달이 왔다. 나는 새달, 새날에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오늘 오후, 나는 세례를 받았다. 두손을 가만히 모으고 고개를 가만히 숙이면, 동그란 물방울이 처마 끝에 달리는 빗방울처럼 자꾸 맺혔다. 아차. 나 워터프루프가 아니지. 라고 꾹 참았지만, 세례란 새로 태어나는 것이라는 말을 떠올리며, 갓 태어난 아이의 첫 울음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 원래 태어나면 일단 울어야 되는거다. 그게 검은 눈물이면 안되지만서도.

원체 늦게 자기도 했었지만, 그마저도 간밤에는 아주 많이 뒤척였던 것 같다. 소풍을 앞두었던 어린 시절의 내 마음인지, 극기훈련이 동반된 수련회를 떠나는 내 마음인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설렘인지 괜한 두려움인지 알지 못했다. 나는 마음이 자꾸 찰랑거렸다. 넘실거리다 잠에서 깨면 나는 유독 할머니가 보고 싶었다. 그래도 어둠속에서 손을 뻗어 작은 버튼을 눌러 켜지는 화면이 내 가까이에 있어 다행이라고,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몇 개월동안 예비자 교리를 받게 되었을때, 주변에서는 갑자기 왠 종교냐고 의아해 했던 것 같다. 나는 농담처럼 사는게 힘들어서요ㅎㅎ 라 말하며 씩 웃었지만, 사실 교회가 아니라 성당을 다니겠다 결심한 것 자체가, 내게도 의아한 일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꽤 오래 기독교 신자였던 적이 있었고, 종교에서 마음이 모조리 다 떠나온채로 젊은 이십대를 살았을 때에도,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나게 되면, 막연히 나는 다시 교회로 돌아오리라고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생에는 언제나 절대로 무시못할 타이밍이라게 있고, 그 어떤 순간들이 있어서, 내가 여기에. 지금 여기에 오게 되었음을 안다. 나는 주마다 두번씩 꼭꼭 성당에 나가면서, 그 어떤 위로들을 끝없이 받았다. 그러니 어쩌면 할머니가 이제 세상에 없음도, 장례식의 그 어떤 순간들도, 할머니를 잊지 않고 기도한다는 것도, 이 모든 것들이 다 핑계일지도 모른다. 사실 그저 나는, 아주 많이 위로받고 싶었던거다. 나는 이따금씩 방향을 잃은 것만 같을 때, 내가 어딘가 갈 곳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게는 그 어떤 위안이 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또다시, 내안의 변화를 깨닫고야 말았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사람에게 마음을 둘 곳이 있다 생각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