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지내냐고 묻는 말마다, 나는 그 어떤 망설임도 없이 잘 지낸다고 대답했다. 그건 일종의 건강을 바라는 미신 같은 주문이나, 별탈없이 잘 지내야 한다는 스스로에 대한 약속이었다. 그래서 정말로 내가 잘 지내게 된건지, 아니면 실은 잘 지낸다는 말로 나를 몇 번이고 안심시키며, 그저 지내고 있게 된건지는 모르겠다. 나는 매일 마음을 달랜다. 마음은 그저 잘있다. 아니, 잘 익었다.

누군가에게는 길고, 또 누군가에게는 짧았던 시간들이 지났다. 여름이었던 계절이 어느새 가을의 끝무렵에 접어들었다. 여름 내내 길고 길었던 해가 조금씩 조금씩 짧아져서, 밤이 너무 이른듯이 내게 덜컥 찾아왔다. 나는 해가 질 때면, 마음이 그림자처럼 길어졌다. 내 그림자는 나날이 기울었다. 기울어진 내 그림자를 보면서, 나는 문득, 이제는 정말로 우리가 서로 다른 시간을 살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새 부쩍, 꿈속에 지난 과거가 물감처럼 풀어진다. 내 검은 물감같은 기억들, 아직도 나는, 그 기억의 물감이 내 속에 풀어질 때마다, 마음이 까맣게 흐려진다. 미꾸라지 한마리 같은 과거가, 사람 하나를 이렇게까지 흐릴 수 있다는 사실이, 나는 못내 무섭기도 하고, 또 끝없이 슬퍼지기도 한다. 마음이 까맣다. 내 속이 이토록 쉴 새 없이 첨벙거릴 때마다, 나는 마음이 쉽게 흐려져 한치 앞도 내다볼 수가 없다. 요즈음 나는, 고개를 들 수 없는 순간들이 많아진다. 얼굴을 모조리 다 묻고 어디라도 자꾸 기대고 싶은걸 보니, 그동안 나는 마음이 너무 약해진 것 같다. 마음이 너무 무르고 물렀다. 이따금씩, 누군가 마음에 손을 대려 할 때마다, 나는 때때로 그 손에 기대어 엉엉 울어버리고 싶은 기분에 휩싸인다. 그러다 또 이따금씩, 누군가 내 머리에 손을 올릴때면, 나는 내가 그대로 다 흐무러져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릴 것만 같다.

언젠가의 내가, 까치밥처럼 혼자 덩그러니 매달린 채로, 누가 오기만을 기다렸을 때, 이미 그때 나는, 너무 오래 익어버린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날이 익어, 흐무러지는데, 그 과거의 기억은 도통 허물어질 줄을 모른다. 날이 너무 흐려서, 나는 온통 다 흐물어진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