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2011년이다. 2011년을 음력까지 하나하나 다 지내고 나서야, 이 징그러웠던 한 해가 끝이 나려는 것일까. 9월 말, 사람을 잃고서 시작되었던 지나친 삶은, 한 달이 바뀔 때마다 그 어떤 정점을 찍었다. 나는 몇번이나 오르고 올라서, 정상에 올랐다. 허나 꼭대기 뿐인 삶에서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것은, 그래도 이 지나친 해가 곧 지나칠 수 있을거란 사실 하나 뿐이었다. 그 어떤 것이라도 좋으니까, 대상을 찾아서 원망이라도 하고 싶었던 날들이 불과 몇 시간 전만 같은데, 나는 아직도 겪어야 할 일이 내게 남아있다는 사실에 힘이 풀렸다. 엊그제 새벽, 엄마는 교통사고가 났다. 달리던 차가 갑자기 말을 듣지 않으며 흔들렸다고 했다. 엄마의 기억은 딱 거기에서 멈췄다. 그러나 사고 조사를 담당한 경찰에 의하면, 차는 그대로 중앙의 가드레일을 들이 받아서 차체가 뒤집어졌다고 했다. 전복사고, 전복, 처음 그 단어를 듣는 내게서는 바다향이 맡아졌다. 나는 쉽사리 헤까닥 뒤집어 진 차를, 그 안의 엄마를 상상할 수가 없었다.

일분 전까지만 해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샐샐 웃다가, 전화를 받고나서 또 다시 심장이 바닥으로 내팽겨쳐지는 기분이 들었다. 자고 있던 언니를 깨워서, 손에 집히는 대로 뭔가를 챙겨서, 택시를 잡아타고 달렸다. 11월, 할머니 장례를 치룬 여기, 이 병원 장례식장 계단을 올라오면 바로 눈앞에 응급실이 있었다. 가끔 답답해진 속을 달래러 나갔다가, 피투성이가 된 채로 들 것에 실려오는 사람들을 볼 때면, 나는 더욱더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했던 것 같다. 그렇게 실려오는 사람이, 이제와 엄마가 될 걸 알았을까.

새벽 두시, 응급실에 도착했지만, 한동안 엄마 얼굴을 보지 못했다. 엄마는 얼굴의 어딘가를 꿰메고 있다고 했다. 겨우 응급실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는데, 누워있는 엄마의 얼굴이 풍선처럼 부풀어 있어서 내 엄마를 알아보지 못할 뻔 했다. 그러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얼마 전에 내가 사서 등기우편으로 보내준 3천원짜리 개구리 모양의 반지, 저걸 정말 저렇게 끼고 다녔다. 가까이 가려는데 어떤 남자의 제지에 다시 바깥으로 밀려 나왔다.

입원 수속을 밟고, 병실로 눕기까지는 거기서 더 시간이 흘렀다. 말도 잘 못하고, 제대로 돌아눕지도 못하는 엄마는 얼굴이 너무도 심하게 까지고 퉁퉁 부어서, 나는 어떤 말을 해야할 지 알 수 없었다. 끙끙대다가 잠이 든 엄마를 앞에 두고 나는 언니와 한참 말이 없었다. 엄마는 오늘의 사고로 몸의 갈비뼈 다섯대가 부러지고 금이갔으며, 견갑골이 부러졌다. 눈가가 찢어지고 얼굴에는 심한 열상을 얻었다. 그러나 마음을 조금 고쳐먹으면, 얼굴이 그렇게 심하게 다쳤는데도 그 속의 뇌가 다치지 않았고, 가슴께의 갈비뼈 여러개가 부러졌으나 그 뼈들이 장기들을 찌르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이만하기를 다들 천만 다행이라 했지만, 이미 이렇게 다친 엄마 얼굴을 보면서, 백만 다행이라, 천만 다행이라 생각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언니는 새벽에 떠밀어 다시 집으로 돌아가 출근했지만, 나는 출근하지 못하고 병원에서 하루를 보냈고, 또 정신없이 하루가 지났다. 종종 힘내라는 문자가 오면, 나는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생각했다. 그러나 엄마 옆에만 붙어 있기에도 모자랄 시간에, 또 다시 갑작스러운 돈문제에 봉착했다는 사실까지 괴롭혀 나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곧 정리할 차였기에 차는 보험에 들어있지 않았고, 엄마의 보험 역시 몇 달 전 연체로 실효를 잃었다.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병원비는 하루 사이에 170만원, 허나 사고 당시에 차 조수석에는 엄마의 친구도 있었다. 엄마와는 다르게 외상은 하나도 없었으나, 혹시 모를 검사들을 거쳐가며, 거의 비등비등한 병원비를 지불해줘야 했다. 그 어떤 사고에도 누군가의 건강을 걱정하기 보다, 돈을 먼저 걱정해야 한다는 것, 나는 그게 너무 끔찍하다 생각했다.

이틀이 지나서, 오늘은 엄마의 생일이다. 좋은 생일선물을 해주려고 했더니, 엄마는 병원비를 생일선물로 받고 말았다. 단지 엄마의 생일만을 위해서, 20일에는 학교와 저녁의 아르바이트 모두 다 출근하지 않기로 했었는데, 정작 엄마와는 생일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온종일 병원에만 있어야 할 것 같다. 오늘밤은 남동생이 내 대신 엄마 옆에 있고, 내일은 내가 새벽같이 엄마의 병원에 가기로 했다. 이 시간까지 억지로 버텨가며, 내일 가져갈 엄마의 미역국을 끓이고 있는 딸의 마음은 너무도 복잡하다.

다만 간절하게 빈다. 이 지독한 2011년이 어서 다 지나치기를, 그래서 엄마의 부러진 뼈가 깨끗하게 붙기를, 그 어떤 몸의 상처도, 그 어떤 삶의 상처까지도 우리 엄마에게 만큼은 절대로 남지 않았으면 좋겠다. 부디 바라건데, 이게 끝이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