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대로 살았다. 회계팀, 연중에서 가장 바쁘다는 결산시즌이었고, 그래서 바빴다. 매일매일 모니터와 종이에 숫자들이 쏟아졌고, 나는 온종일 숫자들을 골라내기 바빴다. 어떤 숫자를 골라내고 있을 때면, 나는 내가 동물의 왕국에서 보던 서열 아래의 원숭이가 된 것 같았다. 모니터 앞에 웅크려 앉아서, 온종일 내 윗사람의 머릿니를 잡아주는 기분이었다. 바르지 못한 숫자들은 하루에도 몇 번 씩 튀어나왔고, 나는 지난 일 년의 시간을 전부 뒤적거리거나, 들춰서 바로 잡아야 했다. 그때마다 나 역시도 누군가 내 속을 헤집어 놓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어떤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아서 애를 먹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박멸해야하는 세계, 나는 가끔씩 세스코맨을 부르고 싶다고 생각했다. 누구보다 다정하게 내 잘못을 찾아줄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했다. 박멸하고 싶었다. 이만큼 벌레 먹은 나를.

결산시즌에 들어서면서 점점 더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밤이면 불빛이 환한 큰 간판조차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다. 틀린 숫자를 더 많이 잡은 날엔, 더더욱 보이지 않았다. 나날이 빛 번짐이 심해진다는 걸 깨달았지만, 나는 그럴 때마다 “어쩐지 세상이 엄청 홀리해.” 라며 맑게 웃었다. 부옇게 흐려지는 나날들, 나는 그래서 대충대충 넘겨짚는 일들이 잦아졌다. 어느날 부터는 내 세계의 초점이 사라진 기분이 들었다. 마치 커다란 눈물방울이 맺혀있는 것처럼 세계는 울먹울먹 해졌다. 왈칵 내가 쏟아지는 게 아닐까 무서웠다. 그만큼 시야가 흐렸다. 그래서 눈앞에 네가 그려지지 않았다.

눈앞에 네가 보이지 않을 때면, 나는 온갖 나쁜 짓은 다했다. 눈이 보이지 않아서, 죄책감 역시도 흐려졌다. 그러나 가끔씩은 눈이 선명해졌다. 선명해지는 그 밤에는 습관처럼 죄책감에 시달렸다. 결국 시력교정수술을 한 보람도 없이, 안경을 새로 맞췄다. 안경을 꺼내 쓸 때마다, 네가 선명해졌다. 이것으로 내가 나쁜 사람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사실 나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그래서 너도 믿지 않는다. 너는 한 번의 이해를 바라지만, 사실 나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않는다. 그냥 이 일들이 잠시 우리의 몸 속으로 숨은 것임을 알고있다. 빽빽한 마음 속에 숨어들었다. 마음의 불이 꺼지는 순간에, 벌레처럼 기어나와서 나를 두고두고 괴롭힐 것임을 안다. 이십대의 나는 분명히 삶에서 누군가를 가장 많이 믿어주었던 유일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자신이 있었는데, 이제는 누군가의 인생에서 그 사람을 가장 믿어주지 않은 사람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언젠가 누군가에게 "지금 도망쳐" 라고 말했던 순간을 기억한다. 그때 도망친 네가 내 삶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었다고 말해주고 싶다. 이렇게 마음이 분명해지는 밤이면, 나는 모든 것이 끝내고 싶다. 잡히지 않기 위해 도망가는 벌레처럼 혼신을 다해서 도망치고 싶다. 헌데 너는 이 마음을 알고 나를 파고든다. 잡고 잡히지 않는 날들이 계속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