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냉장고 같은 사람이다. 때문에 내 속에는 별게 다 있다. 그나마 한가지 다행인 것은 그래도 내가 김치냉장고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내 마음에는 냉장실도 있고, 냉동고도 있으며, 그 속은 칸칸히 잘도 분리되어 있다. 나는 좋아하는 것들을 가장 윗칸에 잘 보이도록 올려두었다. 그것들은 모두 싱싱했고, 그래서 쉽게 꺼내졌다. 아랫칸으로 내려 갈수록 장아찌 같은 마음들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것들은 내가 모르는 사이 오래오래 익어지고, 묵어졌다. 그리고 이따금씩 상하기도 했다. 냉동실에는 유통기한이 지나서 이제는 버려야 할 과거들이 꽁꽁 얼어서 빼곡하게 들어차있었다. 내 속에는 뭐가 너무도 많았다. 그래서 아무도 내 마음에 들어올 수가 없었다.

헌데, 너는 이유없이 나를 벌컥벌컥 열어서 내 속을 자주 확인했었다. 사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그래서 나는 네가 내 마음에 손을 대는 것이 너무도 무서웠었다. 너는 가끔 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서는, 상한 음식같은 과거들과, 이미 진작에 유통기한이 지난 것들에 손을 대려고 했다. 네가 내가 방치하는 과거를 꺼내려고 할 때마다, 나는 그대로 버려질까 너무 많이 무서웠던 것 같다.

나는 네가, 내게 보이지 않으려 하는 우울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네가 닫아둔 마음의 우물에는 뭐가 있을지, 아직도 나는 잘 모르겠다. 너는 나를 쉽게 열었지만, 언제나 나는 너를 열어볼 엄두가 안났다. 사실 네 마음에는 그 어떤 손잡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나는 너를 열어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너를 당기지도 밀어내지도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잡혀있던 약속도 거짓말로 파토내고, 홀로 종일 집에 있었다. 그러면서 문득, 네가 이렇게 또 나를 열어놓고 떠날거라는 사실을, 또 다시 온몸으로 실감했다. 며칠전에 네가 말을 꺼내던 그 밤에, 잘됐다고 웃는 착한척이 아니라 울어보기라도 할 걸 그랬다. 앞으로 남은 3개월이란 시간은, 마음의 준비를 하기에 얼마나 짧은 시간일까. 한때, 맨 윗칸에는 네가 있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너를 어디에 두어야 좋을지 모르겠다.